2015년 6월 2일 화요일

한자 부수 나라와 고을 (口,邑/阝)

    2-3-11. 나라와 고을 (口,邑/阝)
전설에 의하면, 황하강 중류에 있었던 부락 연맹의 왕이었던 요(堯)가, 당시 골치거리였던 황하강의 홍수를 성공적으로 다스린 우(禹)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부락 연맹의 왕은 자신의 지위를 자식에게 물려 주지않고, 백성 중에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물려주었다. 하지만 우(禹)의 사후, 아들 계(啓)는 무력으로 왕의 자리를 지키고, 이후 왕의 자리를 자식들에게 세습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에서 최초의 왕조는 하(夏)나라이다.


[그림] 중국의 황화강 중류인 서안, 낙양, 정주, 안양이 중국 역사의 가장 중심지이며 이곳을 중원(中原)이라 불렀다.

하지만 발굴이나 기록에는 하(夏)나라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전설 상으로 존재했던 국가로 취급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최근 발견된 이리두(二里頭) 유적이 이 시기의 흔적으로 추측하고 있다. BC1900에서 BC1600 경에 발생된 이리두 문화는 황하강 중류의 정주(鄭州)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 지역에 발달된 문화이다. 이때부터 신분의 차이가 생기면서 중국 최초의 노예제(奴隸制)가 시작되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은 주색에 사로잡혀 나라를 돌보지 않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지육림(酒池肉林,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과 도탄지고(途炭之苦, 진흙탕이나 숯불에 빠지는 고통)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걸왕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에서 만들어졌다.

BC1600년 무렵 황하강 중하류에 상(商)이라는 부락을 다스리던 탕(湯)은 폭군 걸왕(桀王)을 쫓아내고 상(商)나라를 건국하여 수도를 언사(偃師)로 정하였다. 이후 정주(鄭州) 주변으로 수도를 5차례나 옮겼는데, 후세 학자들은 황하강의 홍수로 인해 수도를 여러번 옮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BC1300년 무렵, 상(商)나라는 황하강에서 북쪽으로 100 여 Km 떨어진 은(殷)으로 천도함으로서 은(殷)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은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한번도 이전하지 않았다. 은(殷)은 지금 하남성 안양(安陽)에 위치하고. 이곳의 유적지를 은허(殷墟)라고 부른다. 은허는 갑골문자를 비롯한 수많은 청동기 유물을 발견되었다.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걸왕(桀王)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지고 백성은 도탄지고(途炭之苦)에 빠지게 하였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신하를 간장에 절여 먹었다는 이야기도 사기(史記)에 나온다.

BC1050년, 황하강 중류의 서안(西安, 당나라 때 長安으로 부름)에 있었던 주(周)의 무왕(武王)은 포악한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주(周)나라를 건국하였다. 무왕(武王)은 이때 공을 세운 신하들과 친척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제후(諸侯)로 봉(封)하여 다스리게함으로서, 중국 최초의 봉건제(封建制)가 시작되었다.

봉건제(封建制)하에서 각 제후들은 여러 개의 고을로 이루어진 제후국(諸侯國)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개의 고을 중 중심되는 고을(邑)을 도읍(都邑)이라 불렀고 나머지 고을(邑)을 비읍(鄙邑)이라 불렀다. 제후들은 왕실의 제사에는 참가하며, 정기적으로 왕에게 세금을 받쳤고, 필요하면 군사를 동원하거나 국가적인 대공사에 참여하였으나,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 데에는 왕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봉건제를 시행한 초기에는,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던 왕과 제후 사이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몇대가 내려가면서 왕과 제후 사이의 관계가 멀어져 갔고, 몇몇 제후들은 세력이 점점 커져 서로 싸우게 되었다. BC 771년에는 주나라는 이러한 싸움에 밀려 수도를 서안(西安)에서 황하강 중하류에 있는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군웅이 활거하는 춘추(春秋)시대(공자가 지은 역사책 春秋가 이 당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가 시작되었고, 주 왕실은 유명무실해져갔다.
결국 BC 403년, 주 왕조는 멸망하여 전국(戰國)시대(국가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에 이르면서 제후는 완전히 독립된 국가를 만들고, 몇몇 국가에서는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게 됨으로써 봉건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춘추시대에만 14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는데 국가 간의 전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역사에서 모든 문명은 전쟁 시에 가장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문명의 발전 뿐만 아니라, 공자, 맹자, 도자, 장자, 한비자, 손자, 오자 등 많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가들이 탄생되었다. 또한 우리가 배우는 고사성어(故事成語)는 대부분은 이 당시의 사건들에서 탄생되었다. 따라서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반드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후 BC 221년, 진(秦)나라의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다시 군은 몇개의 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군현제(郡縣制) 하에서는 중앙에서 직접 군수(郡守)나 현령(縣令)을 파견하여 다스림으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식 왕권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로서 봉건제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만리장성, 아방궁 등의 건축으로 백성들을 괴롭힌 진시황제의 폭정은 얼마가지 못하였고, 한(漢)나라가 탄생되면서 봉건제도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지만, 후한시대에 다시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이후 몇 차례 되풀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행정구역 단위인 군(郡)과 읍(邑)이나, 일본의 행정구역 단위인 현(縣)이 모두 고대 중국에서 나온 용어이다.


■ 둘러싸일 위(口), 나라 국(口) - 둘러싼 울타리의 모습

둘러싸일 위(口)자는 둘러싼 울타리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글자이다. 입 구(口)자와 모양은 같으나, 대부분의 경우 글자 바깥을 둘러싸므로, 입 구(口)자와 혼동을 피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모여사는 지역이나 나라를 울타리나 성으로 둘러싸고 상형문자로는 동그라미(○)나 네모(口)로 표시하였다. 이런 이유로 둘러싸일 위(口)자는 나라 국(國)자의 옛 글자이기도하다.

나중에 지역이나 나라라는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 땅(一) 위에 있는 지역(口)을 창(戈)으로 지킨다는 의미의 나라 역(或)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글자는 나중에 혹시 혹(或)자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원래 의미인 지역이나 나라를 살리기 위해, 흙 토(土)자가 추가되어 지역 역(域)자가 되고, 둘러쌀 위(口)자가 추가되어 나라 국(國)자가 되었다.

고을을 나타내는 읍(邑)자도 비슷하다. 고을 읍(邑)자는 지역을 나타내는 동그라미(○)나 네모(口)아래에 꿇어 앉아 있는 사람의 상형인 꼬리 파(巴)자가 들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울타리로 둘러 싸인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임금 군(君)자는 다스릴 윤(尹)자와 나라 국(口)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나라(口)를 다스리는(尹) 사람이 임금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임금을 군주(君主)라고 불렀다.

그림 도(圖) 혹은 지도 도(圖)자는 둘러싸일 위(口)자와 마을 비(啚)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어떤 지역(口) 내에 마을(啚)을 그린 지도(地圖)의 모습이다. 마을 비(啚)자 내의 口은 집이나 담을, ㅗ는 길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추정한다. 마을 비(啚)자는 나중에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고을 읍(阝)자가 붙어 마을 비(鄙)자가 되었다. 주나라 때 행정구역으로 도읍(都邑)과 비읍(鄙邑)이 있었다.

가죽 위(韋)자는 원래 성이나 지역(口) 아래 위로 발의 모습을 그려 "둘러싸다"라는 의미를 가진 글자였으나. 나중에 "가죽"이란 의미가 생겼다. 그래서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둘러싸일 위(口)자를 추가하여 둘러싸일 위(圍)자가 만들어졌다. 분위기(雰圍氣)는 주변을 감도는 느낌이다.

곤할 곤(困) 혹은 괴로울 곤(困)자는 나무(木)가 울타리에 둘러싸여(口) 자라지 못하고 곤란한(困難)한 지경이라는 의미이다.
세균 균(菌) 혹은 곰팡이 균(菌)자는 벼(禾)를 밀폐된 창고(口)에 넣어두면 풀(艹)의 일종인 곰팡이나 세균(細菌)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굳을 고(固)자는 둘러싸일 위(口)자에 소리를 나타내는 옛 고(古)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굳어져 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어떤 물건이든 오래되면(古) 굳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고착(固着)은 굳게 들러붙는다는 뜻이다.

둘러싸일 위(口)자는 감옥을 뜻하는 뜻하는 글자에도 들어간다.
가둘 수(囚)자는 사람(人)을 감옥(口)에 가둔다는 의미이다. 감옥에 갖힌 사람을 죄수(罪囚) 혹은 수인(囚人)이라고 한다.

둘러싸일 위(口)는 "둥글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갑골문자에는 동그라미가 사용되었지만, 이후 붓을 사용하기 사용하면서 모든 글자는 직선화되었고, 따라서 동그라미도 네모로 표시하였다.
둥글 단(團)자는 둘러싸일 위(○→口)자에 실패를 나타내는 오로지 전(專)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오로지 전(專)자는 둥근 실패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을 본따 만든 글자이다. 여기에 둥글다라는 의미의 둘러싸일 위(口)자를 추가하여 "둥글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만들었다. 단체(團體)는 같은 목적으로 모인 동아리이다.

돌 회(回)자는 둘러싸일 위(○→口)자가 두개이다. 둥글고 둥그니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회전(回轉)은 빙빙 돈다는 의미이다.

둥글 원(員) 혹은 수효 원(員)자의 상형문자를 보면 둘러싸일 위(○→口)자 아래에 솥 정(鼎→貝)자가 그려져 있다. 즉 둥근 원을 강조하기 위해 둥근 솥은 그린 모습이다. 나중에 "수효"라는 의미가 생기면서, 둥글다는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둘러싸일 위(○→口)자를 다시 바깥에 둘러 싸서, 둥글 원(圓)자를 새로 만들었다. 인원(人員)은 사람의 수효(數爻)이고 원주(圓柱)는 원기둥이다.

▶ 圍 : 둘러싸일 위, 둘러싸일 위(口) + [가죽 위(韋)] / 분위기(雰圍氣)
▶ 固 : (둘러싸여) 굳을 고, 둘러싸일 위(口) + [옛 고(古)] / 고착(固着)
▶ 圈 : 우리 권, 둘러싸일 위(口) + [문서 권(卷)] / 대기권(大氣圈)
▶ 園 : 울타리 원, 둘러싸일 위(口) + [옷 길 원(袁)] / 정원(庭園)
▶ 囹 : 감옥 영, 감옥 위(口) + [하여금 영(令)] / 영어(囹圄)
▶ 圄 : 감옥 어, 감옥 위(口) + [오(吾)→어] / 영어(囹圄)


■ 고을 읍(邑/阝) - 고을과 그 곳에 사는 사람의 형상

경계로 둘러싸인(口) 고을의 모습에 사람이 꿇어 앉아 있는 모습(巴)을 합쳐놓은 형상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울타리로 둘러 싸인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을 읍(邑)자는 간략하게 阝로 쓰는데, 언덕 부(阜)의 간략형과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언덕 부(阝)자는 항상 왼쪽(阿, 險, 隔, 障)에, 고을 읍(阝)자는 항상 오른쪽(鄭,郡, 都, 郞)에 사용된다. 고을 읍(阝)자는 나라, 지역, 지명 등을 나타내는 글자에 들어간다.

도읍 도(都)자는 고을 읍(阝)자에 [사람 자(者)→도]자가 합쳐진 글자이고, 마을 비(鄙)자는 고을 읍(阝)자에 [마을 비(啚)]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봉건제(封建制)하에서 각 제후들은 여러 개의 고을로 이루어진 제후국(諸侯國)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개의 고을 중 중심되는 고을(邑)을 도읍(都邑)이라 불렀고 나머지 고을(邑)을 비읍(鄙邑)이라 불렀다.

전국시대 이후로 중앙의 왕이 전국의 고을을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가 실시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고을 군(郡)자는 고을 읍(阝)자에 [임금 군(君)]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즉 임금(君)이 직접 통치하는 고을(阝)이란 의미이다.

나라 이름 정(鄭)자는 고을 읍(阝)자에 소리를 나타내는 [제사지낼 전(奠)→정]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제사를 잘 지내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정(鄭)자는 주로 우리나라 성씨에 사용됩니다.

땅이름 랑(郞)자는 고을 읍(阝)자에 [어질 량(良)→랑]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나중에 사내 랑(郞)으로 가차되어 사용되었다. 낭군(郎君)은 남편을 일컫는다. 고을 읍(阝)자 대신 계집 녀(女)자가 붙으면 아가씨 랑(娘)자가 된다. 낭자(娘子)는 아가씨를 뜻한다.

고을이름 망(邙)자는 고을 읍(阝)자에 [망할 망(亡)]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북망산(北邙山) 하남성 낙양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무덤이 많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성곽 곽(郭)자는 고을 읍(阝)자와 누릴 향(享)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누릴 향(享)자는 성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망루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글자이다. 고을(阝)을 둘러 싸고 있는 높이 솟아 있는 집(享)이 성곽(城郭)이라는 의미이다.

역말 우(郵) 혹은 우편 우(郵)자는 고을 읍(阝)자에 [변방 수(垂)→우]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변방(垂)에 있는 고을(邑)로 역말을 타고 간다는 뜻에서 우편(郵便)이란 뜻으로 변화했다. 고을 읍(阝)자 대신 눈 목(目)자가 들어가면 잘 수(睡)자가 된다. 잠잘 떄 눈(目)을 감기 때문이다. 잠을 수면(睡眠)이라 부른다.

간사할 사(邪)자는 고을 읍(阝)자와 [어금니 아(牙)→사]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원래 고을 이름을 나타내었으나 나중에 간사하다는 뜻이 생겼다. 사무사(思無邪)는 "생각에 사악한 것이 없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올바름을 일컫는 말이다.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시삼백편이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子曰 詩三百이 一言而蔽之曰 思無邪)"는 문귀에서 유래한다.

떼 부(部)자는 고을 읍(阝)자에 [떼 부()]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사람의 무리나 떼를 의미하는 부()자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고을 읍(阝)자가 추가되었다. 고을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살기 때문이다. 이후 마을이나 부락(部落)이란 의미도 생겼다.

거리 항(巷)자의 상형문자를 보면 함께 공(共)자와 고을 읍(邑→巳)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즉 고을에서 함께 공유(共有)하는 것이 거리라는 의미이다. 거리 항(巷)자에 물 수(氵)자가 합쳐지면 항구 항(港)자가 된다. 포항(浦港)은 포구(浦口)와 항구(港口)이다.

▶ 部 : 떼 부, 마을 부, 고을 읍(阝) + [떼 부()] / 부서(部署), 부락(部落)
▶ 郡 : 고을 군, 고을 읍(阝) + [임금 군(君)] / 군현제(郡縣制)
▶ 邙 : 고을이름 망, 고을 읍(阝) + [망할 망(亡)] / 북망산(北邙山)
▶ 邯 : 고을이름 한, 고을 읍(阝) + [달 감(甘)→한] / 한단지몽(邯鄲之夢)
▶ 鄲 : 조나라 서울 단, 고을 읍(阝) + [홑 단(單)] / 한단지몽(邯鄲之夢)
▶ 鄭 : 정나라 정, 고을 읍(阝) + [제사지낼 전(奠)→정]
▶ 郞 : 땅이름 랑, 사내 랑, 고을 읍(阝) + [어질 량(良)→랑] / 낭군(郞君)
▶ 都 : 도읍 도, 고을 읍(阝) + [사람 자(者)→도] / 도읍지(都邑地)
▶ 邦 : 나라 방, 고을 읍(阝) + [우거질 봉(丰)→방] / 우방(友邦)
▶ 郊 : 들 교, 고을 읍(阝) + [사귈 교(交)] / 교외(郊外)
▶ 邱 : 언덕 구, 고을 읍(阝) + [언덕 구(丘)] / 대구(大邱)
▶ 郵 : 역말 우, 우편 우, 고을 읍(阝) + [변방 수(垂)→우] / 우편(郵便)
▶ 邪 : 고을이름 사, 간사할 사, 고을 읍(阝) + [어금니 아(牙)→사] / 사무사(思無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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